깨달음을 향해 숨어드는 사람들은 많이 있었다.

세상의 모든 것들을 뒤로 한 채, 짊어질 수 있는 만큼의 욕심과 무거운 몸뚱이만을 가지고. 

 

회오리치는 생각의 사슬에 몸부림치고, 가질 수 없는 한계에 절망하며, 모든 것들을 놓으러 떠난 사람들. 그들은 저마다의 방법과 각성으로 절대성을 향해 매진했다. 그러한 갈망의 지루한 날들은 계속되었고, 희노애락애오욕은 점점 흐릿해지다 맑아지다를 반복하다 어느 순간 아무 것도 비치지 않는 맑고 깨끗한 거울 앞에 놓여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그러던 어느 순간 그 거울과 나마저 잃어버리고 모든 것이 텅비어 버린다.

 

 

깨달음. 기쁨이라고 표현하면 너무 얕고 천박해 큰일 날 것 같은 상태. 그래서 깊이 있고 고상하게 표현한다. 그리고 조금씩 확고해지고 깊어가는 사고와 감정, 그리고 육체의 변화에 주목하며 정진을 계속한다. 어디까지 가야할 지 모르고 어디가 그 종점인지도 모른 채.

 

온갖 시련과 번민 같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들을 통찰하고, 범인들이 생각하지 못하는 절대적인 곳까지 닿아, 이제는 더 이상 정진할 필요가 없어진 부처. 그는 중생들을 고통의 늪에서 구제하기 위해 일찌기 떠나온 세상 속으로 다시 발을 들여놓았다고 한다.

 

부처, 그는 왜 다시 세상 속으로 나왔을까?

깨닫고 처절하게 닿았던 그 상태에서 벗어나 왜 고난의 세상으로 나왔을까?

중생들을 구제하고 깨달음을 전하기 위해서... 좋은 의도라고 할 수 있겠지.

 

 

그의 가르침과 깨달음, 그리고 불교의 교리 등 부처와 관련된 깊이 있는 것들을 나는 거의 알지못한다. 하지만 사람으로 부처가 닿은 그 곳, 그 상태(열반)가 그가 찾고자 했던(그 끝을 미리 생각하고 짐직할 수 없을테지만) 궁극적인 종착지였을까 하는 의문이 들기도한다. 그가 닿았던 그 곳이 궁극의 끝이었다면 생명은 조용히 침묵으로 녹아들게 되지 않았을까?

 

 '너무 일찍 그 곳에 닿게 되면 그 곳에 닿은 뒤에는 더 이상 할 것이 없지 않겠느냐? 정녕 그 곳에 닿고 싶다면 죽음에 아주 가까워졌을 때 닿는 것이 최선일 것이다.' 때, 깨달음을 향한 갈증의 나날을 보내던 나를 현실 세계로 불러온 것은 이런 생각이었다. 

 

두뇌가 불러오는 생각의 사슬들. 어찌 그냥 끊어낼 수 있단 말인가. 생각에 빠져 허우적거리거나 애써 생각을 감추고 도망 치는 수 밖에. 그러다 보면 어느새 삶이 나른해지고 생각도 지쳐버리는 게 되는 거지.

 

사람들은 저마다 생각하고 판단한 나름의 관념이 있고 그것을 사실이라 믿으며 살고 있다. 그것을 아집이라는 불편한 이름으로 부를지라도, 그러한 판단과 믿음이 없다면 부초처럼 나날을 휩쓸리며 살게 될테니 그것은 정녕 값진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부처는 왜 세상으로 나왔을까?'

그 깊은 뜻을 난 전혀 알 수 없다.

 

하지만 그가 세상에 나와 많은 일을 벌여놓았으니 이젠 어찌 할 수 없는 일이다. 

그가 세상으로 나와 남겨놓은 또 다른 혼란(말씀?)과 번뇌는 깨달음에 대한 왕도(王道)가 아니라 복잡한 미로가 되어버렸다.

미로. 그 속에서 구도자들은 평생을 헤매이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어쩌면 닿을 수 없는 곳으로 지루하지 않게 평생을 나아가라는 그의 진정한 가르침일지도 모르겠다고 이 어리석은 중생은 생각을 마무리한다.

 

 

 

- 설산

반응형
Posted by 남김없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