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파르타쿠스의 실체 - MBC 미스터리 세계사 (마산MBC. 20060910)

아래 내용은 'MBC 미스터리 세계사 - 스파르타쿠스의 실체'의 내용을 축약, 편집한 것입니다. 
 

칼 마르크스는 그를 '고대사에서 가장 빛나는 인간'이라고 했다.

그의 이야기는 1960년 스탠리 큐브릭에 의해 영화로 제작되었다.

 

스파르타쿠스에 관한 몇 안되는 사실은 로마인들이 기록한 것으로 그의 개인사보단 그의 반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로마인들은 그를 야만인이라 했다.

 

 

1. 로마의 노예들

그 당시 다른 지역에서 온 노예들은 200만명으로 로마 전체 인구의 1/3을 차지했다.

빛이 들지않는 지하숙소에서 최고 400명의 노예들이 이름도 없이 지내기도 했다.

로마인들에게 노예들은 내부의 적이었으나, 존재감이 없는 인간들이었다.

노예가 인간적인 대접을 받는 일은 드물었다. 하지만 단 한 곳, 검투장에서는 노예도 인간같은 대접을 받았다. 로마에서는 장렬히 싸우다 죽는 것을 최고의 미덕으로 쳤으며 설령 노예라도 예외는 없었다.

 

2. 노예... 검투사가 되다

검투시합은 위대한 사람의 장례행사 중 일부로 치르지던 것이 발전한 것이었다.

 

(이미지 출처 : 미국드라마 '스파르타쿠스')

 

"고대 검투사의 신분은 아주 독특했습니다. 검투장 안에서는 로마인들의 숭배를 받았지만 신분상으로 아주 낮았습니다. 수치스러운 신분이었고 시민권은 없었어요. 그는 범죄자처럼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았죠. 검투시합에 나가 싸우는 건 일종의 벌이었습니다. 로마인들을 즐겁게 해주는 벌을 받은 거였죠." - 마리아 와이크 (레딩대학교 교수)

 

3. 스파르타쿠스는 어떻게 검투사가 되었을까?

스파르타쿠스. 그는 오늘날 불가리아에 해당하는 트라키(Thrace) 출신으로 침략군인 로마에 맞서 용감히 싸웠다고 한다. 그는 싸움을 시킬 노예, 검투사에 적합한 인물이었다. 그는 로마로 팔려가지 않고 수백킬로 남쪽에 있는 도시, 카푸아(Capua)로 팔려갔다.

카푸아는 아주 중요한 로마의 검투사 유적지가 있으며, 그 당시 로마 검투 시합의 중심지였다.

경매에서 스파르타쿠스를 산 사람은 '랜틸루스 포티아누스'로 카푸아에서 검투사를 양성하던 사람일 것으로 추측된다.

검투사 양성소에서는 트래키인, 이탈리아인, 독일인들을 언어와 문화별로 따로 격리시켰다.

 

4. 탈출... 그리고

BC 73년. 스파르타쿠스는 검투사 양성소에서 70명의 검투사들과 함께 급조한 무기를 가지고 순식간에 탈출한다.

 

(출처 :구글지도 이탈리아 베수비오산)

 

 

그들은 해발 1,200m의  베수비오산으로 숨어들었다. 산 아래에는 방종과 타락의 도시, 폼페이가 있었는데, 폼페이는 비교적 방어가 허술한 편이었다. 그리고 이 도시에도 커다란 원형 경기장이 있었고 검투사 노예들이 다수 있었다.

검투사들, 도망친 노예들, 그 지역에서 토지를 빼앗긴 갈 곳없는 주민들... 로마에 불만을 품은 사람들이 베수비오산으로 모여들었다. 오랫동안 핍박받아온 그들은 스파르타쿠스에게서 새로운 지도자의 모습을 발견한다.

한편, 로마에서는 스파르타와 그의 동료들을 잡기위해 3천명의 로마 군사를 동원한다. 하지만 스파르타쿠스는 타이밍 센스가 좋았고, 그의 무리가 자리잡은 산 위에서는 캄파니아 평원이 한 눈에 보여서 적의 움직임을 쉽게 파악할 수 있었다.

포도넝쿨로 만든 투망을 쓰고 전대원을 동원해 적군을 가파른 비탈로 몰아가며, 스파르타쿠스와 그의 무리는 로마군의 뒤를 공격... 뒤쪽에 있던 미숙한 군인들을 당황시키며 로마군을 도망치게 만든다.

 

5. 승승장구...

승리를 자신하며 파견했던 로마군이 반란군에 패해자 로마 원로원은 도끼 상징물을 당당하게 앞세우며 이 전의 두 배에 달하는 6천명의 로마군을 파견한다. 하지만 이들 역시 격퇴당하고 도끼 상징물도 스파르타쿠스의 무리에게 빼앗기고 만다.

스파르타쿠스는 베수비오산에 안주하지 않고 남쪽의 작은 마을로 재빨리 이동을 시작한다. 그는 전리품들을 모든 대원들과 공평하게 나눠가짐으로써 로마군 장군들과는 다른 형태의 새로운 지도자의 모습을 보여주었으며,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개념의 전쟁을 치르고 있었던 것이다.

이탈리아반도의 남쪽, 로마로부터 560km의 거리에 있는 (바다와 접해있고 가파른 언덕이 앞을 막고 있으며 풍부한 식량자원이 될 평야가 있는) '메타폰툼'(Metapontum)에 도착한 스파르타쿠스와 그의 무리들은 이 곳에서 겨울을 준비하게 된다.

이 곳으로 전리품을 사기위한 장사치들이 몰려들고, 그와 그의 무리들은 전리품을 팔아 무기와 갑옷을 제작하며, 훌륭한 군인으로 단련하게 위한 훈련을 시작한다.

 

글라디오스(Gladius) : 단검. 길이 56cm, 무게 1.4kg 정도.

 

 

하지만 여러나라 출신의 대원들을 단결시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갈리아인과 셀틱인들은 처음으로 그에게 이의를 제기한다.

그리고 크릭서스가 이끄는 독일인들도 그에게 저항한다. 그들은 노략질하는 것을 더 좋아하는 다루기 힘든 집단이었다.

스파르타쿠스는 자기의 지휘가 불안함을 느끼고, 노예 반란군들에게 공통된 목표를 만들어주기로 결심한다.

 

6. 북으로 진군

스파르타쿠스는 로마군을 기다리지않고 북쪽으로 진군한다. 그는 알프스 산맥을 넘어 고향으로 가기로 결심한 것이다.

독일인들도 이 계획에 동의했지만, 행군은 자기들끼리 하겠다며 무리에서 떨어져 행군을 했다. 그러나 가르가노산(Mt. Garganus)에서 매복중인 로마군에게 잡혀, 리더인 크릭서스를 포함해서 독일인 2천명이 잔혹하게 죽임을 당한다.

스파르타쿠스는 그를 추모하는 검투시합을 개최했는데, 그 시합의 검투사는 바로 포로로 잡힌 로마군인들(로마군 포로는 300명)이었다.

로마인들보다 더 로마인다워진 반란군의 이러한 모습에 로마인들은 두려움을 느끼기 시작했다.

 

7. 알프스 산맥에서

로마군은 외국군대와 싸우느라 정신이 없었다. 이탈리아에는 뛰어난 군대가 없었다. 하지만 이탈리아반도 북쪽을 맡고있던 '카이오스 카시우스'가 이끄는 로마군은 이탈리아에 있던 기존의 로마군들과는 다른 뛰어난 군인들이었다. 

스파르타쿠스가 이끄는 2천명의 반란군은 알프스 산맥 앞, '무티나'(Mutina. 지금의 모데나)에서 바로 '카이오스 카시우스'가 이끄는 로마군과 만난다. 하지만 승승장구하는 반란군들의 기세를 꺾지는 못하였다. 스파르타쿠스의 반란군이 '카이오스 카시우스'의 로마군마저 무찌른 것이다.

원래 알프스 산맥을 넘어 고향으로 가려했던 이들 무리는 승리에 도취되었고, 약탈의 맛을 알게 되었으며, 스파르타쿠스와 함께라면 지지않을 것이라 확신하게 된다. 그리고 다시 발길을 돌려 이탈리아반도의 남쪽으로 진군을 시작한다.

 

8. 마르쿠스 리시니우스 크라수스

다시 남으로 진군을 시작한 스파르타쿠스의 무리들에게 로마는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이때, 로마 정치계에 입문하기 위해 전장에서 승리한 경험이 필요했던, 로마의 부호 '마르쿠스 리시니우스 크라수스'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막대한 돈으로 6군단의 군인을 모집해서 로마를 방어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공성 무기가 없는 스파르타쿠스는 로마를 직접 공격하지 않고 외각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피체눔'(Picenum)에서 크라수스의 로마군과 전투를 치른다. 그리고 쿠라수스의 군대에 승리를 거둔다.

전멸의 위험을 느낀 크라수스는 고대 로마의 처벌인 '데시메이션'을 부활시킨다. '데시메이션'이란 고대 로마에서 겁쟁이에게 내리던 벌로 10명마다 1사람씩을 뽑아 처형을 하는 무서운 형벌이었다. 이 형벌로 4천명의 로마군이 같은 로마군 전우들에게 맞아서 죽음을 당한다.

'데시메이션'을 행하자 크라수스가 이끄는 로마군인은 스파르타쿠스보다 크라수스에게 더 큰 두려움을 느꼈으며, 군인들은 도망치지 않았고, 다음 전투에서는 반란군을 격퇴하게 된다.

그리고 반란군들은 이탈리아반도의 남쪽으로 내몰리기 시작한다.

스파르타쿠스는 로마의 곡창지대며, 예전에 노예반란이 일어났던 '시칠리아섬'으로 도피할 생각을 한다.

신화에서 실라와 카리브투스라는 괴물이 산다는 시칠리아로 향하는 험한 바다를 건너기위해 스파르타쿠스는 일단을 무리를 보내 해적들과 거래를 하려했으나 배신만 당한다. 겨울이 오고 있었고, 북쪽으로 향하는 길은 크라수스가 그들을 굶겨죽이기 위해 쌇은 성벽이 버티고 있었다.

궁지에 몰린 스파르타쿠스의 반란군들은 높은 성벽을 뚫고 북으로 향하기 위해 전투를 벌였으나 6천명이 전사하고도 성벽을 넘을 수 없었다.

스파르타쿠스는 로마군 포로들을 십자가에 매달아 양쪽 군대 모두가 볼 수 있는 곳에 두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반란군에게는 실패의 대가를 로마군에게는 자신의 기개를 보였다.

 

십자가형(crucifixion)

"18cm짜리 로마의 군사용 쇠못을 팔목이나 손바닥이 아니라 손목 아래 부분에 박았습니다. 미끄러짐 방지를 위해 나뭇조각을 함께 박았습니다. 그리고 세번째 못은 작은 아카시아 나뭇조각을 댄 다음 양쪽 발목을 통과하도록 박습니다. 그렇게 못 박히면 흉곽에 엄청난 압박감이 옵니다. 압박감을 덜려면 발로 서야 하는데 발목에 못이 박혀있는 상태라 불가능하죠. 폐에 압력이 가해져 숨을 못 쉬게 됩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고통은 견딜 수 없이 심해지고 몸이 처지면 다시 고통이 반복됩니다. 십가가형은 오랜 기간 고통을 주었고 로마군 중에는 72시간을 고통 당한 사람도 있었죠."

 

 

9. 최후의 결전
로마군의 승리를 기다리다 지친 로마 원로원은 해외로 원정나간 군대를 불러들인다. 명장 폼페이우스와 루크수스가 이끄는 군대는 바다를 건너 반도의 동쪽과 서쪽에 상륙한다.
크라수스는 라이벌들의 출현으로 조바심이 났다. 이를 안 스파르타쿠스는 크라수스에게 항복해줄테니 대원들의 목숨을 살려주고 형을 감해줄 것을 제안한다. 하지만 노예들과의 협상을 수치라 여긴 크라수스는 단호하게 거절한다.
스파르타쿠스는 야밤을 이용해 난공불락인듯한 성벽을 넘어 자유를 위한 탈출을 감행한다. 로마군들은 3군데에서 노예 반란군들을 조여오고 있었다. 이때, 독일인 노예들은 자기들끼리 싸우겠다고 나섰다가 크라수스의 군대에게 3만 5천명이 죽음을 당한다.
솔라리스 강이 있는 루카니아. 로마군과 스파르타쿠스는 최후의 결전을 치르고 스파르타쿠스의 무리는 패하고 만다.

 

10. 죽어 전설이 되다
로마군은 스파르타쿠스가 로마군을 무찌르고 빼앗았던 5개의 독수리 깃발과 26개의 군대 깃발을 되찾았다.
크라수스는 노예 반란이 되살아나지 않도록 원천봉쇄하기 위해 노예 반란군 중 살아남은 6천명을 이끌고 반란이 시작된 카푸아로 간다. 그리고 그곳에서부터 로마까지 이어지는 아피아가도를 따라 6천명을 십자가에 매달아 놓았다. 이 시체들은 3개월이나 매달려 있었다.

 


전성기에는 군세가 12만명에 달했던 스파르타쿠스의 반란군. 2년 동안 로마군을 상대로 아홉 차례나 승리하고, 이탈리아를 두 번이나 종단한 그들. 그리고 그들의 지도자 스파르타쿠스.
루카니아의 최후 전투에서 그의 시신은 끝내 찾지 못했다. 이렇게 사라져버린 시신은 그를 신화의 일부로 만들고있다.

 

 

 

- 설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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